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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랑시에르를 통해 노동운동과 노조를 생각한다

by NPS 2023. 2. 23.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2008) 한국어판 서문에서 나는 정치학을 배우는 학생도 정치학을 가르치는 선생도 아니었지만 학창시절에 식민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마르크스의 텍스트와 알튀세르의 해석을 통해 사회운동 이론을 발견했으며, 68운동의 충격을 겪고 마르크스주의 과학과 혁명 정치의 고전 모델로부터 이탈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회의 진화 및 정치에 대한 주요 이론 작업들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그는 이론 작업보다 노동자 역사 문서고에 대한 연구를 더 선호했다.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이론이 아니었다. 라깡의 가르침이나 들뢰즈의 철학을 끼워 맞추기 위해 다른 이들이 시도했던 이론적 시도들도 아니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노동자 파업 및 봉기, 노동자 연합과 유토피아적 공동체들의 역사이자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일상 경험이나 다양한 독학 체험들을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이의 결과물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밤: 19세기 프랑스에서의 노동자의 꿈(Proletarian Nights: The Workers' Dream in Nineteenth-Century France)이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정치적 이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이를 통해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안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2008년 한국을 방문해 가진 대담에서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와 자신의 작업을 대비시켰다.

 

알튀세르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론과 그에 따른 해방에 관한 담론에 중점을 두었다. 기본적으로 알튀세르는 지배가 무엇이고 착취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교사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고 사유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람시에게 중요한 것이 상이한 정체성들 간의 헤게모니 문제였다면, 정치에 대한 나의 사유 안에서는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가 지닌 정체성의 문제,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시사IN, 2008129)

 

그래서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의 자전적인 글 또는 노동자 문학이나 노동자들의 글쓰기에 주목하며, 이것들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표현되는 영역임을 강조한다. 표현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불화와 불일치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재료가 되며, 합의에 기초한 정치의 관점을 넘어선다. , 사회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것이 합의의 정치라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과 그들의 목소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불화와 불일치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무지나 이데올로기적 오인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걱정은 서구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계승된다. 서구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본격적으로 이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서구마르크스주의의 소위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나 보완, 확장된 사회구성체론과 상부구조에 대한 집착이 기초하고 있는 문제틀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속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혁명적 계급의식과 정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철학적, 이론적, 정치적 전위 혹은 지도자들의 실망감과 당황스러움을 반영한다. 알튀세르는 강박증적으로 이 문제에 집착하여 자신의 이데올로기론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테제를 생산한다.

 

랑시에르가 이별을 선언한 대상이 바로 알튀세르이다. 그는 68혁명 이후 자신과 함께 마르크스를 연구해 왔던 스승 알튀세르에게 작별을 고한다. 대신 그는 스스로말하지 않고 대신 누군가에 의해말해져야 했던 노동자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의 경험세계의 발화들을 모아낸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의해 끊임없이 호출(호명)당하는 오인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주체화가 아니라 기존의 감각(감성)의 분할 체계에서 배제되거나 주변부적인 위치를 할당받았던 사람들이 감각의 분할 체계의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가 언어의 주인, 시와 노래의 주인, 철학과 글쓰기의 주인, 토론과 주장의 주인으로 자신들의 꿈과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주체화의 해방된 시간이다. 감각(감성)의 지배적인 분할 체계에서 통치자, 지도자, 교육자, 대신하는 자, 일깨우는 자들의 세계를 함께 나누어 갖는 것,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거나 나누어 갖는 것,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평등을 전제하고 위치시키는 것이 바로 주체화이다.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자신의 목적은 공장 노예들의 고통과 노동자들이 사는 불결한 가축우리나 통제되지 않는 착취에 의해 소모된 신체의 비참함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어느 날 밤 노동자 신문을 만들기 위해 재단사의 가게에 모인 노동자들, 클럽에서 불려질 노래를 만드는 줄자 제작자와 노래를 감상하고 평가해주는 목수의 모임을 전해준다. 또 노예적 기계의 힘을 축적해주는 잠을 뒤로 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노동과 수면이라는 정상적인 흐름을 탈취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동자들의 밤은 학습과 몰입의 밤이며 배우고, 꿈꾸며, 말하고 쓰는 밤이다(Ranciere, J., 1981).

 

랑시에르는 2012<프롤레타리아의 밤> Verso본의 서문에서 “1830년대의 노동자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그것을 실현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지배의 비밀을 자신들에게 해명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지배가 자신들의 신체에 기입하고 그들의 행위, 인지, 태도, 언어에 부과하는 형식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적, 물질적으로 철회시키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자유롭기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의 용어로 현실에 가담하고 자신의 삶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투쟁이었다고 덧붙였다(Larson, 2013).

 

랑시에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꿈을 꾸는 노동자를 발견하고, 노동자를 노동자의 위치에 있도록 강제하는 모든 담론들(사회주의 담론도 여기에 포함된다)에 맞서 노동자들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을 꿈꾸고 욕망하는 모습을 보다 해방적인 정치론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경우 개인들의 욕망과 선택, 꿈과 시도들을 자본주의 내적인 허위의식으로, 또 권력이나 체제의 훈육이나 통치성의 결과로 비판하려는 시도는 중단되어야 한다. 또 자본주의와 권력의 감각적 분할과 계급적 경계, 정체성과 문화적 경계, 지식과 예술의 경계 속에서도 이 경계들을 넘고 혼란시키는 주체들의 욕망과 시도들을 정치적 공간으로 인정하고 이 공간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들에 주목하게 된다.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노동을 새로운 사회의 정초 원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소수파의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자, 그들이 정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이 정말 공통 공간 속에서 모두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단지 욕구, 불평, 항의의 존재들이 아니라 근거와 담론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자, 그들이 근거와 근거를 대립시키고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의 증명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Ranciere, J., 1998/2008, 113-114).

 

그래서 노동자들은 평등을 선언해야 한다.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고 적대자에 대한 항의와 무시, 파업과 이탈, 파괴적 폭력을 조직화하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를 함께-나눌 수 있는 자로 스스로를 긍정하고 그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가, 정치인, 교수, 예술가, 언론인과 평등한 존재이며, 이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노동자 또한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세계를 함께-나누고’, ‘을 나누어갖는 평등한 위치에 있음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이 평등의 선언, 세계 나눔의 선언은 을 넘어 의 시공간 속에 존재해야 한다.

 

윤석열 정권의 노조 때려잡기 노동개혁론, 건폭(건설조폭), 폭력귀족노조와 같은 용어들이 전면화되는 시기에 노동자와 노조가 사회구성원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기업과 노동현장의 변화를 주도하며 한국 사회를 고쳐나가는 주인의 위치에 올라서길 바란다. 자본과 기업의 소유물이자 이들의 요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을 넘어 노동자들이 먼저 기업을 성장시키는 주인이자 보다 좋은 일터를 만들어내는 주인으로서의 사고와 공동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