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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다시 집의 철학, 집의 정치학으로

by NPS 2021. 2. 4.

이영주(경기도의원/전환과 미래 연구소장)

 

산업화 이후 가장 경악스러웠던 시골 풍경의 하나는 이웃하는 것들과 급진적인 단절을 선보이며 들어선 고층 아파트였다. 논과 밭, 산과 들, 이웃하는 가옥들을 무시한 채 자신만이 홀로 솟아오르는 한 두 동의 아파트 단지 모습은 참으로 기괴해 보였다. 시골의 대지는 점점 아파트나 다가구 주택들로 채워지고 서로 어색한 풍경이 자리잡았다. 시골 사람들은 아파트나 다가구 주택을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구옥을 떠나 신식 주택으로 이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40-50여 년이 흐른 지금 시골이나 외변지역을 들썩이게 하는 전원주택이라는 또 다른 바람이 불고 있다. 이 바람은 잠시 불었다 그칠 것 같지 않다. 전원주택 건축업계, 지역의 부동산 개발업자, 자치단체들의 인구 불리기 정책, 대도시의 주거비용의 압력을 벗어나야 할 한계 상황과 함께 대도시 탈출을 꿈꾸며 또 다른 에 대한 욕망이 결합되어 있는 전원주택을 둘러싼 물질문화의 바람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전원주택의 시대 또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에 대한 대안적 철학이나 가치관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는 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동시에 집이 위치해 있는 마을과 공동체에 대해 더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집이 중요했고, ‘내 집의 상품가치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동네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내 집에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된다. ‘다른 집이 어찌 되든 내 집의 가격만 상승하면 되고, ‘내 집만 불가침 지대가 되면 좋다. ‘은 소유와 집착의 대상이 되었고, 생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을 소유하거나 다른 집보다 더 비싸고 웅장한 집을 차지하기 위해 투여해야 한다. 물론 이같은 집의 물질문화가 개인의 자연발생적인 의지와 욕망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근대 이후 토지와 주택 정치경제학이 심화되고, 부동산 거래를 통해 얻는 수익이 노동으로부터 얻는 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한국에서 '은 전략 자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집이 신분과 계급을 표상하고 과시하는 상징자본이자 집을 매개로 발생하는 다양한 구별짓기로부터 얻는 심리적 만족 자본이 된다는 점에서 집이라는 물질문화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확산되고 있는 전원주택을 향한 욕망을 모두 부정적인 어휘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전원주택을 향한 욕망과 바람의 생성 원인이나 확산의 방향을 모두 단일하거나 동형적인 것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다. 일례로, 충남 홍성군 홍동마을과 같은 곳에는 거래 상품이자 구별짓기, 상징적심리적 자본으로서의 전원주택의 바람을 찾기 힘들다. 면 단위의 이곳에서는 주민들 모두가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마을을 꾸며 나간다. 연구소, 도서관, 농산물가공공장, 농장, 어린이집, 농업전문학교, 비누공장, 로컬푸드 매장, 마을주점, 책방, 출판사 등 마을기업과 협동조합들이 즐비하다. 주민들은 협동의 가치를 내세우며 자주적 협동경제를 실험중이다. 홍동마을 관련 보도기사와 포털사이트의 이미지 자료들을 보다 보면 마을의 모든 공간이 한 두 사람의 신분과 계급을 과시하고 타인과 괴리된 채 자신의 성()을 쌓으며 상업적 투자와 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을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위용을 자랑하는 전원주택을 발견하기 힘들다. 공간 속에서 자신과 타인의 삶이 만나고, ‘함께그리고 모든 이들이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불어 닥치고 있는 자본으로서의 전원주택의 바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홍성 홍동마을의 경우는 서울이나 대전과 같은 대도시에서 거리가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공존과 협력의 공동체를 꿈꾸기 쉬울 수도 있다. 실제로 대도시의 외변지역 특히 대도시로의 출퇴근이 가능하고 부동산과 주택 투자의 가치가 있는 지역에서 생성되는 전원주택과 공간 상업화의 거센 물결은 심각한 지역 내, 지역 간 문제를 유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낳고 있다. 수 많은 외변지역들이 정부, 개발업자, 상업 세력들에 의해 특성없는 도시화의 길을 걷고 있다. 숲과 강이 줄어들고 이 자리에 호화로운 주택단지가 들어선다. 아스팔트 도로가 늘어나고 러브호텔과 레스토랑, 커피전문점, 갤러리, 고급 음식점 등 상업시설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외변지역의 막개발을 막기 위해 존재했던 규제법들이 완화되거나 사라진 틈을 타 온갖 유형의 상업 세력들이 외변지역의 공간을 점유한다. 이렇게 확장되는 상업 세력과 공간들은 그 지역의 전통과 역사, 원주민의 삶이나 대안적 공동체와 유리된 채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외변지역의 정치와 문화 또한 새로운 상업 세력들이 주도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구축한다. 이렇듯 대도시 근교의 외변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개발과 투자, 상업화와 이주의 물결이 탈 대도시를 꿈꾸는 사람들의 전원주택 바람의 근원지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집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또 집을 둘러싼 대안을 찾고 대안적 집살이를 중심으로 마을과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 어떤 정치보다 중요한 정치의 무대가 될 것이다.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난 건축가이자 집의 철학자인 정기용은 전원주택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에 집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한번 쯤 동경하고 살아보고 싶은 전원주택이 대도시 주변에 상품으로 대체되어 쏟아지는 상황에서 던진 질문이다. 그는 전원주택을 분명 상품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준농림지를 형질변경해 적당히 서구적인 외관에 큰 창을 통해 자연 경관이 들어오기만 하면 그럴싸한 집이 되고, 진입로의 풍경과 편리한 정도에 따라 값을 정하면 전원주택이란 전형적인 부가가치가 보장된다. 자연 속에 있으며 외관이 어느 외국잡지나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하고, 푸른 잔디가 깔린 앞마당이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전원주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집을 모두 완전한 전원주택이라 할 수 있는가? 전원주택 이전에 주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근원적인 부분이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주택문화에서 결핍된 것은 소위 이 땅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이 시대의 삶을 진정으로 담지해 낼 좋은 건축에 대한 체험이다. 무엇이 참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가치이며, 무엇은 옛 건축에서 배우며 지속시킬 것이고, 무엇은 이 시대의 삶에 맞도록 차이를 만들어나갈 것인지, 우리는 이런 근원적인 질문이 결여된 상황에서 좋은 건축을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듯 하다. 집은 재산 목록에서 보자면 개별적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땅과 환경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집도 그의 집 하나로만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대지는 그 옆의 땅과 붙어 있으며 바로 나의 집, 나의 땅이 중요한 것은 이웃하는 산과 계곡과 멀리 보이는 구름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주택은 근본적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 공공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