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경기도의원/전환과 미래 연구소장)
벌써 까마득한 시간이 지났다. 정치판에 새로운 영웅이자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떠들썩했던 때가. 새로운 희망을 걸 수 있었고 과거를 뒤엎고 지금과는 전혀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정치적 영웅이 나타났다며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는 바로 안철수였다. 그리고 그는 영웅적 언사들로 이 기대에 응답했다. ‘당신들이 불러서 여기 왔고, 당신들의 소망을 내가 실현하겠다’ 식의 정치적 수사로 자신을 영웅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대중의 호출’에 응답하고 불려나가 대중들로부터 주어지는 명령을 실행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내세웠다. 대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그 영웅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장벽들 앞에서 비장하게 외쳤고, 그리고 무너졌다. 스스로 패배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패배는 패배가 아닌 ‘양보’였고, 그 영웅은 스스로 거대한 장벽 앞에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투쟁하기를 포기했고, 대중들의 공분과 동정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을 눈물을 흘렸고 안철수를 좌절시킨 진보정치에 분노했다. 그리고 그들은 박근혜를 선택하거나 문재인을 선택하거나 투표를 포기했다. 그리고 안철수는 잠시 사라졌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되었으며, 당내 투쟁 끝에 탈당해 국민의당을 만들었으며, 보수주의자 유승민과 손잡고 바른미래당을 창당했으며, 지금은 다시 국민의당을 이끌고 돌고 돌아 2021년 4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안철수 신화는 사실 그의 정치적 레토릭의 효과와 함께 안철수를 새로운 정치적 영웅이자 정치적으로 좌절당한 사람들의 치유자로서 끊임없이 위치시켰던 언론과 진보 진영의 정치 평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사실 그의 핵심 지지자들은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리고 안철수 스스로 자신을 규정했듯이 그는 중도 보수-우파이다. 안철수는 결코 진보 정치인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보수-우파의 공공영역에서 성공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지 문화적 힐러이자 영웅처럼 부상했고, 사람들은 이에 열광했다. 그의 다정다감하고 포용적인 표정과 언어, 유연한 생각들이 새로운 정치를 창조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의 15년 이상 거의 변화하지 않고 유지되는 굳건한 권력구조와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진정 맞설 수 있는 사람으로 안철수를 위치시켰다. 그리고 그는 패배한 야권과 진보정치의 대표 주자로 기대를 받았다.
안철수 현상이 한창일 때 박권일은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안철수 현상의 기층에 있는 것이 개혁의 당위라기보다 ‘힐링(치유)’의 열망이라고 말했다. 이 열망은 분명 진보적 정서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힐링 열풍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피로감과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만들어낸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정서이다. 그래서 제18대 대선은 좌우파 이념 전쟁이 아니라 ‘감수성’ 전쟁이었다. 누가 힐링하고 안정시킬 수 있는가, 누가 그 감수성을 더 잘 전달하는가의 싸움이었다(박권일, 2012년 12월 31일 한겨레신문). 박권일의 해석은 그 어떤 다른 해석보다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진보 진영의 패배, 무력감, 좌절감, 불안감 등 복합적인 정서들은 매우 퇴행적인 과정에서 결국 위로자와 치유자를 찾아내는 ‘힐링의 정치학’으로 이동했다. 인터넷과 SNS의 진보 진영의 담론들은 정치적 상처 앞에서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힐링의 상호작용’을 광범위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국면에서 자신의 분노와 상처, 좌절감과 패배감,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다독거려주는 사건이나 대상, 인물이나 생각에 과도한 감정적 집착을 보여주었다. 진보 진영은 늘상 이같은 정서의 공동체, 감정의 정치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치유의 의례들을 심화시켰다. 언론보도와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인터넷과 SNS 상에서 이같은 힐링의 정치에 참여했다. 그리고 안철수는 이같은 ‘힐링의 진보정치’가 초대한 우발적인 주체였다.
힐링의 진보정치의 서사는 매우 흥미롭게도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 위기’가 발생하고, 이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영웅적 주체가 호출되고, 이들이 혁신적인 정치적 실험을 추구하다, 기존의 정치적 장벽 앞에 무너지거나 실패하며, 이로부터 발생하는 거대한 집단적 패배감과 공분, 무력감 등을 치유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집단 간 힐링의 담론과 실천들이 생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위기) -- (영웅적 주체의 호출) -- (시도와 도전) -- (좌절과 패배) -- (보상과 치유)
그리고 이같은 힐링의 진보정치학의 징후들은 또 다른 여러 사례에서도 분석될 수 있으며, 또 누군가가 이 정치적 힐러이자 영웅적 주체의 자리에 초대받을 것이다.
안철수는 ‘안철수 이야기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구성되어 소비되는 대표적인 정치인 중에 한 명이다. 즉 그는 이야기 속 인물이며, 상상적으로 상징화된 인물이다. 특히 안철수는 갈등과 대립, 분열의 치유자로 상상되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안철수를 통해 통합과 화해, 대립의 해소라는 정치적 과제가 개혁-진보정치를 이끄는 최고의 가치로 요구된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를 소통과 화해, 통합과 중도라는 가치 속에서 표현되고 실행되도록 요구한다. 안철수는 특정한 계급적 이해관계, 특히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자본가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이해관계의 외부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말해짐과 동시에 탈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철수 현상은 오히려 정치의 부재를 재촉했다. 서동진의 비판처럼 안철수 현상은 정치가 대표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안철수는 정치는 ‘누군가의, 무엇인가를’ 대표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닌 어떤 것도 정박되지 않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말하는 정치를 생산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는 “대표의 정치를 표류시키는 과정”이자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안철수는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으려 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대표하려는 정치적 입장과 담론들을 생산하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 행하고자 하는 정치에 대해 진정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하고 주장하지만, 그의 정치는 부지런히 움직임으로써 중단되지 않는 ‘목적없는 운동’, ‘주체없는 과정’일 수 있다.
무페(Mouffe)는 최근의 민주주의 이론과 운동이 합의의 신성시, 좌/우의 구분의 퇴색, 좌파 정당들의 중도적 위치화의 경향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근대 민주주의가 갈등의 인정과 정당화, 권위주의적 질서를 통해 그것을 억압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로 특징되기 때문에, 잘 기능하는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대립과 가능한 대안들에 대한 참된 논쟁을 요구한다고 본다. 민주주의에서는 불일치와 반대가 민주주의적 정치의 재료를 제공하며, 바로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의 투쟁이 전개되는 쟁점이다. 정치적 경계가 희미해지면 정치의 다이내믹스가 방해받고 뚜렷한 정치적 정체성의 구성이 저해된다. 이와 함께 정당에 대한 불만이 시작되고 정치과정에 대한 정치적 참여는 가로막힌다(Mouffe, C., 2000/2006, 173-174쪽). 한국 사회에서 안철수 현상은 무페의 정치 철학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대표했다. 즉, 안철수 현상은 지금 정치적 경계를 희미하게 하고 해체하며, 명확한 정치적 정체성의 구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고자 한다. 정치가 중층적인 대립과 갈등의 지점에서 뚜렷한 정치적 정체성과 대표성을 가지고 구성되는 것이 아닌 이 자체를 비난하고 반(反) 정치적인 것으로 배제함으로써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무페가 생각하는 정치(정치적인 것)는 불일치와 대립 즉, 적대(antagonism)를 에워싸고 형성된다. 따라서 정치(정치적인 것)는 항상 ‘비어있는 기표’이자 조화롭게 평화를 이룰 수 없는 상징계의 구멍이다. 또 정치는 사회의 각기 다른 형식들을 생성해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Stavrakakis, 1996/2006, 184쪽). 따라서 우리는 사회를 조화로운 전체로서 사회-정치적으로 설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는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진정한 정치(정치적인 것)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Stavrakakis, 같은 책, 184-187쪽)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철수 현상은 많은 좌파 정당들이 우경화되고(영국의 제3의 길, 독일의 신중도 등)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그 어떤 곳’에 자신들을 위치시키고자 했던 사례들의 우파적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제3의 길’이 ‘새로운 사회의 유일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중도적 합의’를 주창하고 ‘근대화’의 프로젝트를 내세우거나 이에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보수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했던 선언(Mouffe, C., 2000/2006, 19-21쪽)을 안철수 현상은 반복한다.
김세균은 안철수 현상에 대해 두 가지 큰 의미를 부여했다. 첫째, 기성정치 전체를 불신하는 청년층의 정치적 관심 유발과 청년층의 정치화 둘째, 새로운 세대 정치 세력의 형성으로 인한 노년층과 수구보수세력의 약화가 이것이다(김세균, 2012년 11월 27일, facebook 게시문). 동시에 그는 안철수의 보수적 노선이 한국의 (노동) 계급 정치와 잘 조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만큼 안철수 현상은 개혁ㆍ진보적 정치 노선과 이념 및 정책적 지향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여ㆍ야/보수ㆍ진보의 대립 자체를 정치의 실패로 규정하며 정치의 공간을 오히려 빈 공백으로 만들어버리고 여기에 ‘새롭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진입할 수 있는 ‘빈 기표’로서의 정치 공간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유럽의 중도노선이나 좌파 정당들의 우경화가 보여준 것처럼 결국은 보수 우파 정당의 지속적인 승리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과 유사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안철수의 중도노선이나 여-야, 보수-진보의 정치적 대립 자체를 반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세대주의를 내세우는 안철수 현상은 한국사회와 한국정치의 보수화라는 마차를 이끄는 말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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