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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와 정치② -68, 아도르노 그리고 한국의 진보정치-

NPS 2023. 3. 17. 17:43

68혁명에 등진 아도르노의 비극

 

68혁명(또는 68운동)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60년대 후반 유럽, 북미, 남미,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사회 비판과 투쟁의 물결을 일컫는다. 전후 20년 이상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타협(복지국가, 분배 정책, 노동자 투쟁의 완화, 법치)은 사회적 합의의 정치 동학과 기제들을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부, 관료, 정당과 전문화된 이익단체들이 권위와 질서를 표방하는 관리되는 사회혹은 행정화된 사회에 통치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여기에 시장, 경쟁, 개인의 성공, 소비, 정치 참여로부터의 거리두기와 같은 부르주아 문화가 지배적인 가치로 확립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공산권 국가인 체코나 중국에서도 사회변화를 향한 열망이 분출되었고, 소련의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뒤따랐다. 이같은 상황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로부터 시작된 반전운동, 미국의 인권운동, 프라하의 봄, 파리의 5월 혁명, 파업, 독일의 학생운동 등 국제적인 저항과 투쟁이 분출되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1960년대 후반에 분출했던 학생운동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아도르노는 68운동이 일종의 좌파 파시즘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비판이론의 지주였던 그가 표출한 68운동에 대한 반감이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사태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독일 학생운동과 68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동, 서독이 분단된 이후 서독은 1960년대 후반까지 엄청난 경제성장을 보였지만 나치 협력자들의 귀환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악용, 미국의 영향력의 확장이라는 정치적 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1966년 좌파계열의 사민당은 많은 지식인과 학생, 좌파 노조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수 정당과 대연정을 맺었고, 19685월 긴급조치법을 제정하는데 협력하기에 이른다. 국가를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와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권위주의, 새로운 세대와 문화에 대한 기성세대의 억압 양상들도 심화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서독은 1950년 중반 이후 개인의 소비 능력의 증가, 소비재의 대량생산, 주택 보조, 대도시 재건과 자동차 연계형 이상도시 계획, 연금개혁에 따른 노동자나 노인층의 복지 혜택 확대, 고용 안정이라는 사회적 안정성을 획득한다. 이와 함께 전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청바지, 코카콜라, 영화, 팝송은 유럽의 젊은 세대를 파고들었다. 재즈와 존 레논(J. Lennon), 밥 딜런(B. Dylan), 조안 바에즈(J. Baez) 등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경치침체기로 들어서고 대량생산에 기초한 제조업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개발도상국의 경쟁력 상승, 석유 소비로 인한 석탄 대체와 석탄산업의 쇠락, 철강석의 고갈과 철강 산업의 몰락, 실업 증가와 같은 문제들이 연달아 심화되었다. 또 외국인 노동자들의 체재 기간이 연장되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독일에 유입되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교육정책은 부족했다. 이와 함께 역사를 포함한 학교 교육에서 나치 역사를 은폐하거나 삭제하려는 나치 동조자였던 교사들에 대한 반감도 확산되었다.

 

60년대 후반의 정치, 경제적, 사회적 균열 상황에서 대학과 공동체주의 집단을 중심으로 68운동이 전개된다. 1967년 공동주택으로 이주해 공동체 생활을 실험했던 코뮨주의자들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방과 부엌, 거실과 서재 등 주거 공간들을 공유했다. 코뮨주의자들은 소가족을 국가의 가장 작은 세포로 간주하고 억압의 기원을 가족에서 찾았다. 이들은 가족을 파괴할 것을 주장하고 자유로운 성생활이나 대마초나 약물 사용을 옹호했다. “자유롭게 일하고 자유롭게 살자(In Frieden arbeiten, in Freiheit leben!)”가 이들의 대표적인 구호 중 하나였다.

 

학생운동과 함께 68운동은 반미, 베트남전 반대, 보수언론반대, 기성세대의 가치관이나 규범 및 도덕에 대한 거부, 사회 전면에 깔려 있는 권위에 대한 거부, 한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에 이르기까지 보다 공격적인 정치색을 띠게 된다. 장발과 자유로운 복장, “서른 살이 넘은 자들을 신뢰하지 말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너희를 파괴하는 것들을 파괴하라” “모택동 만세” “미국은 히틀러의 특수부대, 히틀러의 친위부대” “, , 호치민-”과 같은 구호들이 독일 68운동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들이다. 대학생들은 학기 시작을 알리는 학장 이임식을 방해하거나 총장 취임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1946년 결성된 SDS의 투쟁이 가장 극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두치케가 과격한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수업거부, 대학 건물 점거, 단식농성, 공공시설의 운영 중단이나 점거가 뒤따랐다. 대학생들은 교육의 전면적인 개혁, 교육기관과 과정에 대한 공동 결정권을 주장했다. 정부의 긴급조치법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고 노동자들과 재야 시민세력들이 학생운동과 결합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SDS는 전략적으로 재야세력의 주요군단으로 자리를 잡는다. 1967년 중반에 SDS1600180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고, 68 절정기에 서독에 2500명 정도가 있었다.

 

SDS1966년부터 베트남 전쟁 반대시위를 벌였다. 196762일 이란 왕 부부가 서베를린을 방문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으며, 나치 출신 판사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베트남 전쟁, 미국의 제국주의 반대, 대학교의 민주화, 대연정이 의결한 긴급조치법 반대 등을 주제로 196711월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다. 또 두치케의 피습 이후 SDS1968413일 밤 베를린에서 슈프링어 회사 소속의 신문을 수송하는 화물차량을 공격했다. 두치케에 반대하는 보수매체에 대한 공격이었다(한국연구재단 기초토대연구 DB에 게재된 <독일과 프랑스의 68운동>과 유럽 유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베를린리포트><유럽 리포트>에 실린 내용들을 참고, 인용).

 

독일 68운동은 독일 사회의 탈권위적 노력들을 이끌었다. 고등학교에서 교과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합의 추구, 대학의 교수식당과 학생식당 간 구분 폐지, 포르노 잡지의 자유 발행, 남녀 기숙사 구분의 폐지, 연구소장직 제도의 폐지와 이에 따른 정교수의 힘 축소, 대학내 협의체 확대, 학생들 사이에 존댓말을 줄이고 경칭을 일상화하기, 평상복 착용, 가정 내 구성원 간의 역할 분담, 여권신장 등 다양한 변화 모습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독일 68운동은 이후 8년 정도를 거치며 서서히 소멸되기 시작했다. 경제상황의 호전과 함께 체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동조, 학생운동에 대한 반감, 대학 신설이나 대학구조개혁 등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 공산권과의 유화정책 확대가 이어지면서 68운동세력은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베를린리포트, 1999, 04, 18).

 

비극으로 끝난 68비판

 

60년대 학생운동과 공동체주의를 포함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집단에게 비판이론가들의 영향은 매우 강력했다. 마르쿠제는 독일 68운동의 정신적 영웅으로 평가받기까지 한다. 또 파시즘과 권위주의, 자본주의의 통제와 억압체계에 대한 가장 강렬한 비판자였던 아도르노가 68세대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상식처럼 여겨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심화된 냉전구조와 독일의 재무장,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 전략, 사회 전반에 걸친 권위주의적 억압성의 문제들은 전 세계적인 파시즘의 부활에 대한 신좌파들의 비판의식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68에 대한 불화의 시선을 던졌다.

 

68의 아도르노는 학생운동의 급진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아도르노는 좌파 파시즘을 우려하는 하버마스의 주장을 옹호한 반면 급진적 학생운동을 지지했던 마르쿠제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1969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 진입한 학생 시위대를 끌어내 달라고 경찰을 부른 사건이나 아도르노의 강의 시간에 그의 죽음을 선언하며 상의를 벗고 조롱한 여학생 사건은 68을 대면하고 있는 아도르노의 비극을 재현한다. 실제로 아도르노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몇 개월이 지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사회주의 학생 그룹은 196812월 전단을 살포하며 아도르노는 이론적으로는 비판적이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순응주의자다”(Freyenhagen, F., 2014)고 비난했다.

 

여러 비난에 직면해서도 68 시기에 아도르노는 마르쿠제의 해방 정치론에 거리를 두었다. 마르쿠제는 베트남이나 다른 3세계 지역에서 정치 운동을 자극하는 생사를 건 투쟁이나 잔혹한 압제도 해방 정치를 위한 유익한 요인으로 중시했다. 마르쿠제는 시민권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북베트남 공산체제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군사 활동을 벌거벗은 자들의 방어로 묘사하면서 벌거벗은 자들의 실재적 공포를 도구화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마르쿠제가 베트남이나 다른 3세계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것을 비판했으며, 급진파 학생들이 아도르노 자신을 베트남이나 3세계 민족해방운동이나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아도르노는 68 초기 학생들의 저항을 지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학생운동을 위기로 규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유아적인 도발을 추구하며 비판적인 자의식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다(Cutrone, C., 2009).

 

아도르노는 행위자가 좋은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반대로 억압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아도르노는 소비에트 체제가 내전이나 외부의 압력의 결과로 쉽게 억압적 체제로 돌변했던 사례를 언급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점령에 반대한 저항 운동들이 맹목적인 명령 구조를 수반하고 협조자나 배신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정당한 절차없이 참혹한 처벌을 가했던 역사적 경험을 사례로 제시한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할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도르노는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무비판적 사고를 경계했다. 또 아도르노는 실제 필요한 것이 항상 옳은 것과 일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며, 운동이나 정당에 있어서 지체없이 최대한의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폭력적 손상을 수용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도르노는 저항하는 자들이 더욱 폭력적이 되고 억압하는 자가 됨으로써 폭력이 가속화되고 억압이 증가한다고 생각했다(Freyenhagen, F., 2014).

 

아도르노는 민주사회에서 폭력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고 끝이 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 시위는 일을 더욱 악화시키고 더 큰 억압을 조성한다. 아도르노는 오직 파시스트 체제에 맞서는 폭력적 저항만이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측면에서 아도르노는 학생운동 급진파들의 폭력 행위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도르노는 서구 민주주의에 게릴라 전술을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라고 단언했다. 아도르노는 정치 행위의 목적과 수단이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투명해야 하며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Freyenhagen, F., 2014).

 

아도르노는 우리가 옳은 삶에 잘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후기근대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아도르노는 후기근대사회가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모든 개인의 삶에 대한 무관심과 소외를 심화시키며 전체주의적 지배를 향해 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점진적인 개혁에 의해 후기근대사회의 근본적 전환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같은 점진적 개혁은 최악을 막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고, 결국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현재 사회세계를 위협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관리될 수 없는 세계를 더 잘 관리하는 행정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아도르노가 사회로부터의 철수나 사회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을 주장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도르노는 올바른 삶을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 형식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순수한 숙고 상태로 후퇴하는 것을 체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우리가 지금 사회세계에서 무엇을 하든(그것이 정치적인 행위이든 사적인 품위를 지키는 것이든, 그것이 실천이든 이론이든) 잘못을 행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좋은 의도나 개혁의 행위들은 이것을 변화시키는데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과 변화를 위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도르노는 이같은 한계에 대한 인정 속에서 정치적 행위가 어떤 조직 내부의 주류나 주도층 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Freyenhagen, F., 2014).

 

8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와 대립을 아도르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80년대 이후 40여년의 시간 속에 아도르노의 시선을 던져본다. 독재와 폭력적 국가기구,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투쟁 속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구축해왔던 억압성과 또 다른 권력에 대한 성찰과 비판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전대협과 한총련으로 이어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성찰 또한 본격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적대하면서 서로 공존하는 거대 양당과 정치집단, 그리고 이와 관계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문제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 진보 정치의 이상이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사실 최선의 의도라는 것도 이 의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것이다) 이의 폐쇄성과 억압성, 개인의 희생과 폭력성을 두둔할 수 없다. 집단적이고 전체주의화된 진보 정치 그리고 이의 거울처럼 반대편에서 비추고 있는 보수와 극우 정치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멈추어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고 세우려는 정치, 다양성과 다원성의 정치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참고문헌

 

힌국연구재단 기초토대연구 DB, <독일과 프랑스의 68혁명>.

Cutrone, C.(2009, 08, 06). Adorno in 1969 - Adorno's Marxism and the Problem and Legacy of the 1960s Left in Theory and Practice, "Adorno- 40 Years On" Conference, University of Sussex, U.K.

Freyenhagen, F.(2014). Adorno's Politics : Theory and Praxis in Germany's 1960s, Philosophy & Social Criticism 40/9, 1~43.

Witkin, R. W.(2003). Adorno on Popular Culture, New York :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