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아도르노와 정치① 좌우를 넘어선 진짜 ‘자유’ 찾기

NPS 2023. 3. 17. 16:53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식 공산주의 모두에 대한 반대자로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대부 중 한 명으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세계적으로 몰아쳤던 폭력적인 사회운동 또한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비판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 어떤 진영에도 몸담지 못한 경계에 선 철학 혹은 지속적인 비판과 부정 철학의 실천자였던 그에게 몰아닥친 급진주의자들의 비난은 결국 그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학교를 떠나 떠돌던 중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서사로 이어진다. 삶 자체가 비극에 가까운 아도르노.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채 자신의 시대와 지식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부정해야 했던 그의 삶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계몽의 변증법초판이 출판된 후 22년이 흐른 196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정판이 나올 때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닌 자유를 지키고, 전개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최고의 자유 가치 즉 사유재산의 자유, 기업의 자유, 시장 행위의 자유, 소비의 자유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왜 인류가 진정한 인간의 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고 질문한다. ‘계몽의 지칠 줄 모르는 자기 파괴’, ‘언어와 사상이 상품을 위한 선전이 되는 상황’, ‘학문의 자기 망각적 도구화(학문이 비판적 요소를 포기하고 단순한 수단이 되어 기존 질서에 봉사하는 것)’,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부합하지 않은 표현의 억압’,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광기의 분출’. ‘·외적 검열 메커니즘에 의한 저항 수단의 박탈’,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이탈과 자연 지배’, ‘경제 세력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 개인’, ‘대중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의 증가할수록 커지는 대중의 무기력과 조종 가능성’,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와 유치한 오락의 범람등 인간이 진정 자유롭기 위해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하는 역사·사회적 상황들 앞에서 아도르노는 자신의 비판이론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는다.

 

우리가 아도르노를 끊임없이 다시 읽고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2014416일 인간이 건축 자재나 제주 미군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사용될 철근 덩어리보다 못한 짐짝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냈던 세월호 침몰사고가 있었다. 침몰 사고 후 정부는 잔인할 정도로 진실 규명을 억압하고 특별조사위원회를 해산시켰다. 노동의 가치는 쇠퇴하고 자살이 노동자들의 최후의 진술 수단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 시간제 아르바이트, 플랫폼 노동 등 노예 상태에 가까운 일자리들이 넘쳐 나고 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일자리라도 감사하게 여기라는 명령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정부는 온갖 화려한 미래 슬로건들을 내걸고 국가 정체성을 강요하고 법치를 내세우며 유순한 시민들이 될 것을 주문한다.

 

미디어는 거짓, 과장, 포장, 과대선전술로 가득차고 촘촘하게 죽도록 소비하기의 욕망 지대 속에 인간을 가둔다. 미디어의 다양성이라는 허구적 수사는 이같은 죽도록 즐기고 소비하기의 자본주의의 주술을 포장한다.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과 인공지능 기술은 모든 인간에 대한 데이터 집적과 분석을 통해 상품을 개발하고 인간을 통제하는데 비밀스럽게 작동한다. 기술은 보다 더 탐욕스러운 자본과 권력을 위해 세계를 에워싸고 있지만, 인간은 기술에 대한 비판적 사유 대신 인간의 미래를 위탁한다. 인간은 상품화와 교환을 위한 양화된 값어치를 갖는 사물에 불과한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총체적으로 관리되고 제조되는 공통의 운명 속에 놓인다.

 

아도르노는 지금의 인간과 세계를 제대로 돌아보라고 요청한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야만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제발 좀 알아차리라고 주문한다. 야만을 야만으로 감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야만의 상태를 계몽과 진보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디 정신 차리고 또 다른 계몽의 작업을 시작하라고 다그친다. 그가 죽은 1969년으로부터 5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아도르노의 진면목은 오히려 지금에서야 더욱 빛나고 되살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