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미디어의 시간 정치학 : 비릴리오(Paul Virilio)의 질주학으로부터

NPS 2021. 1. 24. 21:31

이영주(경기도의원/전환과 미래 연구소장)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계문명의 시간. 자본주의 이후의 시간은 일직선의 시간이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의 삶은 일방통행로 같다. 살아가면서 향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윤을 위해 소비하며 그저 앞으로만 간다. 무섭게 변하는 산업자본의 속도에 휘둘리면서. 이전의 시대와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시간은 청소년과 젊은 사람을 가장 존중한다. 새롭게 발명되는 문명의 이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이 만들어내는 것들에 적응하거나 접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태된다. 낡은 것들이 계속 폐기처분 되듯이 나이가 들면 세계와 접속할 수 없게 된다. 예전의 시간은 좌우지간 인간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래 경험한 사람들이 지혜의 담보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신제품을 쏟아내며 적응할 것을 강제로 요구한다.”

 

철학자 강신주는 속도의 시대, 우리의 시간을 누가 빼앗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o) 또한 시간과 속도를 왜 정치적 주제로 사유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테크놀로지가 인간 경험을 형성하고 역사 발전을 이끌어가는 근본적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나 비행기의 발명, 전화 통신, 영화나 텔레비전의 발명이 19세기 말 이래 인간 경험의 모든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최근에는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 이동전화기술이 사회생활과 정치생활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에게 이같은 기술적 장치와 체계들은 문화와 환경을 결정짓고, 인간 행위의 양상을 바꾸며, 인간이 사는 모습과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비릴리오에게 시간과 속도는 신체 지각 즉, 세계에 대한 경험 방식을 구조화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특정한 신체 지각을 구조화하는 기술적 장치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세계에 대한 습관적인 지각을 조직하는 구조화 원리로 작동하는 기술이 철학과 정치학의 중심 대상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속도현상에 대한 지식체계를 뜻하는 질주학(dromology)을 제시하며, 사회 및 정치 공간을 형성하는 핵심동력으로 운동 및 전송속도를 강조한다. 여기에 따르면, 지금까지 사회는 운송 및 통신 속도가 가속화되는 논리대로 발전했으며, 말을 타고 이동하는 시대에서 철도의 시대로, 전화의 시대에서 라디오 전송 시대로, 텔레비전과 디지털 정보 테크놀로지 시대로 이동해 왔다. 따라서 진보는 새로운 기술적 수단들이 제공하는 전송의 가속화라는 특질을 함축하게 된다. 속도는 집단 경험이 필쳐지는 매체이며, 역사적 역동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다. 비릴리오는 정보전달체계에서 발생한 통신기술의 혁명이 시간정치(chronopolitique)라는 끔찍한 부산물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1970년대 이후 통신기술의 혁명은 도시 공간의 탈영토화를 심화시키고 속도의 정치를 본격화했다. 시간정치는 공간의 전쟁이 가져온 포위상태를 시간전쟁을 통해 비상상태로 뒤바꾸어 놓았으며, 정치인들이 이끌던 정치의 시대를 국가장치에 의한 비정치의 시대로 대체해 버렸다. 가속화와 속도는 세계의 일반법칙이 되었고, 정지는 곧 죽음이 된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의 사회적 삶은 더욱 극단적이고 즉각적이 되었으며 전쟁에 찌든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방향 상실, 대립, 가속화를 겪고 이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스럽고 잔인한 인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질주정에서 지성이란 것은 고작해야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공격과 그 공격을 통해 인간에 본성에 가해지는 공격에 불과한 것이 된다.

비릴리오의 속도정치에 대한 비판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전자커뮤니케이션기술과 미디어의 속도 경쟁과 시간전을 사유하는데 많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엄청난 속도로 이 세계의 모든 구석구석을 연결하고 가시화하며 처리불가능한 정보와 콘텐츠를 생산하는 미디어 기업과 생산자들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며 유동적이고 파편적이며 불연속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일차적인 통로이다. 미디어 생산의 안정성과 연속성이 사라지고 급박한 생산의 요구들이 지배한다. 급박하게 생산된 정보와 콘텐츠들은 생산됨과 동시에 즉시 사라지고 다른 정보와 콘텐츠에 의해 대체를 위한 잠시 동안의 정차 시간을 가질 뿐이다. 미디어 생산자들은 세계를 더 신중하고 깊이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며, 모든 대상들을 재빠른 포착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미디어 기업은 속도정치의 가속화를 위한 기술적 장치들에 목말라하고, 이를 둘러싼 첨예한 경쟁을 이끌어간다. 미디어의 생산의 본질은 내용에 앞서 시간과 속도에 놓이게 된다.

비릴리오는 속도가 일상적인 감각의 순서와 정보가 도착하는 순서를 노골적으로 망가뜨린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서로 갈라지고 분해된다. 속도로 인해 이 세계는 더욱 더 사물을 희생시키고 정보의 전송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순서가 뒤바뀌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세계는 파괴된다.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피크노랩시(기억부재증)의 효과를 생산하고 강화시킨다. 기술들은 인간을 주체적 시공간 밖으로 납치하는 강한 자극을 영원히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는 미디어의 속도만큼 재빠르게 돌아가고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증진시킬 수단과 기술들에 환호한다. 빠른 속도로 생산되는 미디어의 생산물들은 느린 호흡과 다채로운 표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융(Jung)의 생각을 확대시켜 보면, 미디어 속에서의 세계 그리고 미디어로서의 세계는 현실을 평준화시키고 무관심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우리가 가속화된 미디어에 충분히 오랫동안 길들여진다면, 우리 또한 미디어적 상태에 빠져들 것이며, 세계는 순간의 영상들과 신호들로 축소되고, 아무런 연관도 없이 신속하게 우리 곁을 지나갈 것이다.

비릴리오는 현대의 기술들이 가져온 전송 및 통신 속도의 가속화가 즉각적인 현전의 상실과 체화한 체험의 축소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디어는 과도한 전달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환경 자체가 초전도성을 확보했다. 비릴리오에게 이러한 세계는 노년기로 접어든 세계이자 쇠퇴하는 존재의 세계이다. 인간의 집단적 사회와 문화 경험이 현대의 다종다양한 속도기계나 전달 매체에 빠져들수록 인간의 감각 지각으로 생기는 풍부함과 다양성은 상실된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획득되는 세계의 표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미디어나 원격현전의 표상이 체화한 실재 체험보다 중요해지게 되며, 우리는 언제든지 미디어와 속도기계들이 생산하는 원격현전의 표상들의 정치의 영향력에 놓이게 된다.

이같은 생각은 보드리야르(Baudrillard)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미디어가 인간에게 어떤 분리와 공백, 부재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미디어 속으로, 그리고 장애물이 없는 가상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간다. 또 사람들은 미디어 속에서처럼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디지털 방식의 결합처럼 자기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 미디어 앞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없으며, 궁극 목적도 없다.

비릴리오는 20세기 통신위성의 발사와 텔레비전이 가져온 변화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곳에 보러 가지 않고 보기.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지각하기......이 모든 것은 다양한 조형적 연극적 재현 현상 전체만이 아니라 재현적(대의적) 민주주의조차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이제 곧 획일적인 여론민주주의를 만들어내고야 말 전파수단에 의해 이미 그 자체로 위협받고 있으며, 결국에는 실제적 현전으로부터 해방된 사회 형태들의 허약한 균형 상태마저 와해시킬 집단적 감동의 동시적 민주정으로 귀착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보려 하기보다 오히려 동일한 순간에 모두에게 보여지고자 하는 일상현실의 가속화 앞에 놓여 있다.” 그의 이 말은 텔레비전의 시대를 넘어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될 수 있는 토탈 미디어의 시대에 대한 비판적 참조점을 제공한다. ,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PC, TV 등 각종 미디어 스크린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삶이 미디어 안에서 구성되는 상황에서 전자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미디어가 구조화하는 시간정치와 속도정치의 부산물들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될 것이다.